오래전 사람들은 저 웃음을 화난 얼굴로 기억 하겠지요 이끼를 아시나요 투박한 표정 하나 웃게 하려고 정 붙일 데 없는 돌을 기어오르는 녹음의 손가락들, 눈비바람볕 온갖 꽃들이 살랑거린다 한들 손가락 간지럼만 할까요 석상 발끝에서 생겨 몇백 년씩 기어오르는 이끼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돌이 웃을 생각을 다 했겠어요 그저 스쳐 지나는 것들에게 공을 돌리기엔 돌의 미소가 참 묵직하지 않나요
이쯤이면 저도 표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래 지키면 부릅뜬 마음도 가물가물 사라지고 말까 봐 돌부처도 살살 발가락을 움직였을 거예요
내 얼굴에는 얼마의 시간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어느 간지럼을 출발해서 지금 막 도착해 있는 웃음 하나, 생각해보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의 다른 이름은 아닐는지 돌아갈 궤도를 생각하면 표정 하나도 함부로 고쳐 짓지 말아야 해요
양지바른 무덤 옆에 햇살 찡그리듯 웃고 있는 석상이 있어요 몸이 무덤인지 무덤이 몸인지 한자리에서 천 년, 자심(慈心)이 흘러 눈꼬리가 흐릿해요
2017 <서정시학> 여름호
【감상】
시인의 상상력이 발칙하군요. 태초에나 한번 웃었을 돌을 다시 웃기려 하다니. 웃기는 자장면이라는 능청이 있듯이 가능할 듯도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웃기는 걸까요.
그래서 보니 푸르스름한 스란치마 나풀거리는 이끼 처녀가 등장하네요. '녹음의 손가락들', 무슨 해괴한 정반합인가, 죽 쑤고 메주 띄우고 物物을 顯身하게 하는 솜씨! (나라면 돌을 웃기려고 정과 해머를 준비할 것입니다. 쇠모루에 눕히고 앙다문 입꼬리를 꺾으려 쪼아댔을...) 알고 보니 가공할 비법은 다름 할 것 없이 '간지럼'이군요. 이 지점에서 나는 발바닥이 무척 소문 없이 느닷없이 가렵습니다. 시가 내 몸으로 전이되는 순간?
'눈비바람볕 온갖 꽃들'도 겨우 '썩소'나 짓게 할 것인데 이끼 처녀의 호작질에 자지러질 돌이라니, 아니군요. 가만히 웃는 듯 마는 듯 그런 미소로군요. 거참, 이 정도 살갑고 모호한 짓이라면 돌도 온갖 기척과 표정을 집중할 수밖에. (흐린 기미로 천둥과 우레를 부리는 솜씨의 섬세함과 미려함 때문에 나는, 독자는 문장의 지문이 눈동자에 박힐 때마다 등골에서 전류가 찌릿찌릿, 이내 감전되고 마비되겠는데)
관찰과 서정이 서정적 자아의 내면으로 스미는군요. 교묘하게 친절하게 부드럽게 확장하는 솜씨 또한 천의무봉입니다. 각성이 '표정'으로 '어느 간지럼에서 출발해서 지금 막 도착해 있는 웃음 하나', 아마도 이 명문은 돌에서 캐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울물이 흘러도 서로 전혀 다치지 않고 심곡을 부드럽게 만지며 흐르는 문장입니다.
'표정 하나도 함부로 고쳐 짓지 말아야 해요', 이 문장은 너무 다정해서 이런 말 하는 입술을 오래 보고 싶다는 충동조차 드네요.
마지막 연은 그냥, 며칠 동안, 몇 년 동안, 혹은 한평생 사모를 앓듯 아무런 말 없이 쳐다보고 싶네요. 오마이 갓 쓰고,
서정 미학이 이렇다면, 난해도 뺨치고, 불편도 다리 걸고, 무슨 레알 아방가르드인지, 포스트모더니즘의 포스도, 그 거만한 폼들도 무릎 꿇고 절하라는 말인듯싶네요. 저는 이 시를 감상하다가 난처해서 샤머니즘이나 토템이즘이나 주술적으로,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와 심봤다,의 다른 방언 나마스테~~!! (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