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감자 / 길상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18-09-03 23:31본문
씨감자 / 길상호
*
숨소리가 끊기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마다
검푸른 싹이 돋아 있었다
장의사는 공평하게 당신을 쪼개서
가족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
명치에 묻어둔 한 조각 당신이 꽃을 피워 올릴 때마다
꺾고 또 꺾고
*
당신의 무덤을 짓고 난 후로
두 눈은
소금으로 만든 알약
사는 게 밋밋해질 때마다 깨뜨려 찍어먹는
*
검버섯이 번지던 한쪽 볼을,
파랗게 멍이 든 무릎을,
딱딱하게 굳어가던 뒤꿈치를,
오늘도 썩은 감자처럼 당신을 도려내다 보니
남은 새벽이 얼마 되지 않았다
鵲巢感想文
필자는 감자를 좋아하지만, 감자를 자주 심어보지는 못했다. 소싯적에 아버지께서 씨감자를 밭에다가 심는 것을 보았지만 말이다. 그 후 싹이 트고 지심을 뽑고 약과 비료를 주며 길렀다. 감자를 캘 때 주렁주렁 달린 물건을 보면 그냥 좋았다. 굵고 실한 것을 보면 좀 더 단단했으면 하고 마음을 가져 본 적 있다. 아버지는 수확의 보람을 만끽하셨다.
숨소리가 끊기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마다 검푸른 싹이 돋아 있었다. 장의사는 공평하게 당신을 쪼개서 가족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감자처럼 세상에 나와 알곡이 되어야 함을 아버지는 그렇게 묵묵히 몸으로 보여주셨다. 누런 씨감자는 누렇게 허연 씨감자는 허옇게 그러나, 근본을 깨뜨리기에는 어려웠다. 세상은 어쩌면 땅 속과 같다. 혼자 썩어 들어가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뿌리는 더욱 단단하게 새로운 무덤을 짓는다.
사는 게 밋밋해질 때마다 열어보고 깨뜨려보고 약간 돌려서 찍어먹는 재미까지 어쩌면 고독을 잠재우는 일이다. 그렇게 검버섯을 피웠다. 파랗게 멍이 든 무릎을 본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뒤꿈치처럼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면 가판대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명치에 묻어둔 한 조각 당신이 꽃을 피워 올릴 때마다 꺾고 또 꺾었다. 알고 있는 일일수록 더욱 명치에 가둬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말과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얘기할 수는 없다. 비, 바람, 구름, 안개와 같은 여러 일을 겪고 발굽과 날개를 거치며 소금 끼 어린 진실만이 굵고 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虧盈益謙*이라 했다. 하늘은 오만한 자를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자를 도와준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그렇게 묵묵히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사물을 보았다. 어떤 일도 겸손하게 이겨내셨다.
詩 씨감자를 본다. 감자처럼 단단한 이 한 편의 詩에 꼭 내가 장의사가 된 듯한, 기분이다.
===========================
길상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天道 虧盈而益謙 地道 變盈而流謙 易經 하늘의 도는 오만한 자를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자를 도와주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여 겸손한 데로 흐르게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