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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없는 시대에 '불통'이 미덕인가 - 강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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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564회 작성일 16-02-0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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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없는 시대에 ‘불통’이 미덕인가

—우리 시의 오늘과 내일

 

강 인 한

 

1. 시의 바다에 입만 떠있는 진풍경

 

어언간 우리 시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다. 민물에서 자란 장어인지 바닷물에서 자란 장어인지 아무튼 그렇게 모호한 지경에서 자랐고 바다와 민물을 넘나든다는 풍천장어는 맛이나 좋지만 시인이냐 독자냐를 구분하기 모호한 오늘의 우리 시는 슬프고 한심할 따름이다. 시인 이만 명의 시대라는 풍문이 떠돈다. 하지만 독자는 다 어디 가고 독자 없는 시인만 남았는가. 눈과 귀가 사라지고 우리 현대시의 바다에는 온통 입만 무수히 떠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서점의 시집 코너에 꽂힌 창비시선, 문학과지성 시인선, 문학동네 시인선, 민음의 시집들 서가엔 책등의 시집 제목, 시인 이름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책 표지를 드러내어 좌판에 진열한 곳에 몇 종의 시집들이 있다. 아마도 독자들이 비교적 많이 찾는 시집들인가 보다. 시와 그림을 곁들인 도종환 시화선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1판 28쇄 2판 9쇄(2015.1.16), 이해인 시집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1판 8쇄, 그리고 필사해야 할 사랑시라는 게 요즘 유행하는 대세의 시집인 듯. 김용택의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 101편』6쇄. 그런데 필사를 권하는 이 시집들을 보면 왼쪽은 인쇄된 시, 오른쪽은 백지 페이지로 독자가 왼쪽의 시를 필사하도록 된 책이다. 이정하, 용혜원, 고두현의 필사용 시집들이 그런 종류이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12쇄. 신현림 편저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은 51쇄,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초판 12쇄 개정판 17쇄 신개정판 4쇄(2015. 5. 18), 그런 가운데 결코 말랑말랑하거나 닭살 돋는 시가 아닌데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55쇄(2015. 8. 5). 짧은 시편 185편을 묶은 고은 시집 『순간의 꽃』이 28쇄, 류시화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무려 111쇄(2015. 7. 24)다. 요컨대 독자들이 즐겨 찾는 시라는 게 입속에 넣고 씹을 만한 껌 같은 종류의 잠언시나 사랑시, 그리고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들이 많았고 기형도 시집은 예외처럼 보인다. 아마도 문학 지망생들이 꾸준히 찾는 시집인 듯한데 의외로 신예 박준의 시집이 도종환, 김용택, 정호승과 함께 대중들의 눈길을 끄는 건 부드러운 어조의 쉽게 읽히는 소박함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가 이십일 만에 2쇄를 내놓고 있는 건 약간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요즘 유행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대목은 필사를 유도함으로써 나도 시인이라는 착각을 부추긴다는 점일 듯하다. 단순히 시 쓰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폭넓은 개념으로 볼 때 시인이 이만 명, 삼만 명이면 어떠랴. 다만 독자 없는 시인들이라는 점이 서글플 뿐.

서점 좌판에 깔린 저 시집들이 호사를 누리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일반 시집들은 십여 년 전 초판 1쇄를 1천부 찍었다는데 요즘은 기껏 5백부를 찍는다고 한다. 시집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누가 시를 읽는가이다. 월간 시 전문지나 계간지의 시를 읽는 순수 독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작품을 발표한 시인 자신들이 읽거나, 자기가 아는 주변 시인의 작품만 대충 훑어보면 그만이다. 시 쓰는 사람은 2만 명 시대인데 시 읽는 독자는 5백 명쯤. 그러므로 요즘 발표되는 시를 거의 아무도 읽지 않고, 그저 자기의 시만 쓰는 시인이 대다수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때 시집의 판매 부수가 30만을 넘는 베스트셀러가 나오던 시절, 그때의 시 독자층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극과 극의 차이가 실감된다. 예전의 시 독자를 형성하던 보편적인 교양인들은 오늘 몽땅 책이 아니라 스마트폰 등 영상매체에 빠져 있다. 오늘의 시 독자 계층을 파고들면 시 전문 독자(시력 20년 이상의 시인들)를 제외하고는 미미할 정도이다.

 

신춘문예의 계절도 한참 지난 올해 하반기의 신인문학상 현황을 보면 의외로 시인 지망생의 탄탄한 계층이 형성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5월말에 응모를 마감한 『창작과 비평』신인상 시 부문에 751명, 6월 20일에 마감한『문학동네』에 748명, 8월말 마감『중앙일보』신인문학상에는 710명이 각각 응모하고 있다. 그렇다. 실은 7백 명을 상회하는 이 숫자가 우리나라 독서계의 진정한 시 독자일 것이다. 이들이 예의 주시하는 기성시인들의 작품은 어떤 것이겠는가. 당연히 5년 미만의 앞서 등단한 신인들의 작품 또는 요즘 문제작으로 회자되는 시들의 방향에 오래 시선이 머물 것이다. 짐작건대 다음과 같은 시들이 지망생들의 롤 모델이 되었으리라.

 

비밀을 하나 말해줄게 새를 쪼개면 흉터가 된다 오래 전 하나의 흉터가 폭발했을 때 너는 흘러나왔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눌러쓴 모자처럼

 

얼굴의 한 쪽이 흘러내리면 너의 흉터를 보여줘 얼굴을 뒤집어서 모자로 씌워줄게

 

모자를 쪼개면 구석과 구석으로 분열한다 구석을 뒤집어쓰면 불 꺼진 예배당 들어가면 자꾸 속죄할 일이 생겼다 새를 쪼개고 나오면 멀리서, 빛

—여성민, 「새와 모자」뒷부분

 

이 털실은 부드럽다. 이 폭설은 따뜻하다. 이 털실은 누가 던졌기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털실로 뭐 할까 물고기는 물고기를 멈추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끌고가고 끌려가고 이 털실은 돌아다닙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이 선반 위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습니다. 이 폭설은 소원을 이룬다. 폭설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털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털실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아무 형체도 짓지 않습니다. 이 털실은 집어 올릴 수 없습니다. 이 볕은 풀린다. 이 털실은 풀린다. 끝없이 풀리기만 한다. 이 털실은 화해하지 않는다. 그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털실 뭉치를 달고 다닌다.

—이수명, 「털실 따라 하기」전문

 

시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형식에만 집착하는 버릇이 있는 신인 지망생들의 작품을 여기에서 직접 들춰보긴 어려우므로 4천여 편의 예심을 마친『중앙일보』기사(2015.9.4)를 읽어본다.

 

손택수 씨는 대뜸 “태양이 너무 눈부셔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상태와 같은 작품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미지를 촘촘하게 배치해 화려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경향이 지나쳐 정작 읽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작품들을 그렇게 평한 것이다. 강동호 씨는 세련된 스타일이 대세로 느껴질 만큼 내용보다 기량이 승한 작품이 흔하다는 설명이다. 강 씨는 “특히 40대 이상 나이 든 사람들의 응모작 가운데도 모던한 느낌의 작품이 많았다.”고 했다. 대학 등에서 시를 가르치는 시 선생들이 주로 젊은 느낌의 모던한 시를 가르친 결과다. 그래서 위기에 몰린 건 전통 서정시다. 소수, 타자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강 씨는 “형식적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은 없는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2. 난해한 ‘불통’은 시의 미덕인가

 

나에겐 계절마다 만나는 친구가 몇 있다. 지난달 우리나라 카피라이터 원조로 손꼽히는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 내가 전문 시 잡지로 『현대시학』『현대시』가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대뜸 "시인들이 '현대'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옛날에도 『현대문학』이 있었지만." 하고 묻는다.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현대문학』은 진작 사라진 문예지였다. 양모 씨가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 이후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그 보수적인 종합 문예지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래 맞다. 없어진 잡지 중에 『현대-』를 붙인『현대시세계』『현대시사상』도 있었다.

현대…. 모더니즘, 모더니티, 모던. 시를 쓰는 입장에서 살아가는 당대(현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금세 일선에서 뒤처질 거라는 무의식적인 강박증이 저 『현대-』의 제호에서 느껴진다. 지금도 시와 우호적이긴 하지만 요즘 시인들의 시가 지나치게 ‘모던’해서 아예 냉정하게 등 돌린 저 카피라이터의 따끔한 지적은 새겨볼 만하다. 전통 서정시가 위기에 몰렸다는 문화부 기자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어떤 평론가는 한 번 읽어서 금방 이해되는 시는 더 이상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마치 쉽게 이해되는 시를 쓰는 시인은 저급한 시를 쓰는 양 매도하려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에선 난해한 ‘불통’(조연호,「우주 에세이」같은 경우)이 지고지선의 미덕이고, 쉽게 이해되는 ‘소통’(고영민, 「송편」같은 경우)은 최고의 악덕이란 말인가.

 

엄마라는 단어는 문어적입니다. 엄마로 만든 개를 바다에 짖게 하고 싶습니다. 시장에선 한 푼이라도 깎으려고 사람인 걸 포기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낮술에 취해서 난간이 죄다 위험합니다. 거기 머무는 구름 종류가 많지 않아서도 슬픕니다. 소년소녀를 모두 말과 마부에게 맡겨두면 공전주기는 자전주기 아래 반쯤 가라앉습니다. 하루의 절반쯤에서 1년이 지납니다. 약은 모두 섹스 후의 슬픈 알갱이입니다. 숲은 숲에 대항하지 않는 사람에게 뱉은 침이기도 합니다.

—조연호, 「우주 에세이」부분

 

올해 한가위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빚은 기름한 송편도 이 세상에 없고

쪄내면 푸른 솔잎이 붙어 있던

뜨끈한 반달 송편 하나

선산엔 아버지를 넣고 빚은 커다란

흙 송편 하나

그리고 나에게는 예쁜 딸이 둘

—고영민, 「송편」부분

 

일선, 곧 아방가르드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하는 일부 신인들의 몸부림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빽빽한 산문시로 쓰는 건 기본이고 문체도 반말과 경어를 뒤섞어서 혼란을 유도하며 활자의 글씨도 비스듬한 사체, 때로는 진하고 굵은 글씨, 더 나아가 글자 허리에 삭제 표시의 줄까지 두르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적 형태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SF 콩트라고 하면 좋을 산문(김현의 시)이거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짤막한 서사적 산문(박상수의 시)을 시라고 모아서 시집을 낸 경우도 본다. 아무리 전위적인 현대라고 해도 무조건 분량이 짧은 글, 상상력으로 빚은 단편적인 허구에 모두 ‘시’라는 헐값의 딱지를 붙여줌이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다.

 

3. 산문은 산문일 뿐, 산문시가 아니다

 

오래 전 유안진 시인이 발표한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적당히 문장마다 토막 내어 자유시 형태로 늘어놓고 그걸 시라고 우기는 한심한 이들이 있음을 인터넷에서 많이 본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중략)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수필「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자유시처럼 변형시킨 예

 

산문을 이와 같이 자유시 형태로 변형시킨다고 해서 산문의 본질이 사라져버리고 하루아침에 시가 되는 건 아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유안진 시인의 대표시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하는 신진 시인도 있다. 요즘 저런 식의 산문을 시랍시고 발표하는 시인이 적지 않다. 이렇게 산문을 자유시 형태로 눈속임하려 드는 것을 일컬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가상한 노력’이라고 상찬해야 할까.

시와 산문은 엄연히 다른 장르이다. 엄격한 기준으로 말한다면 올해의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최정례의「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치기만만한 산문일 뿐이다. 아무리 높은 거액의 상금을 받을지라도 그게 내 눈에는 기지와 해학을 앞세운 산문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행여 저러한 산문을 태산백두의 산문시로 떠받들어 공부하는 지망생들이 있다면 정말 잘하는 짓이라고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들은 칭찬해줄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 시의 긴장감이나 서정의 풀기가 마른 이성복이 화장실에서 십 년도 넘은 기념 타월을 보고 쓴 시「소멸에 대하여 1」은 행의 구분을 없애고 마침표를 문장 끝마다 찍어서 죽 붙여놓아 보라. 다음에서 보듯 그것은 시라기보다 차라리 산문에 더 가까운 글이다.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생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 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 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 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불태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옛날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복, 시「소멸에 대하여 1」을 산문 형태로 변형시킨 예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산문치고는 센스가 있는 산문이라 할 것이다. 산문시라면 그보다는 김산의 「겨울의 할례」가 빼어난 산문시로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준규의 다음 작품을 통하여 산문시 좋아하는 시인들은 다시 한 번 산문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근본을 짚어보는 게 좋겠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이준규, 「복도」부분

 

4. 지향해야 할 시, 내일의 시

 

십 년 넘게 나는 카페〈푸른 시의 방〉 좋은 시 읽기 코너에 날마다 잡지나 시집에서 좋은 시를 두세 편씩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시 한 편을 다 타이핑하고서도 곰곰 되새겨보다가 못내 지워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눈에 든 티처럼, 목에 가시처럼 좋았던 전체의 기분을 홱 바꿔버리는 것. 아래에 최근에 겪은 몇 가지를 들어본다.

 

①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바람 드는 곳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② 창문엔 내내 비悲가 내린다

③ 씻어내며 골라내는 동안 생략되어지는 시간들

④ 나는 어머니와 씹한 적도 있다

 

우리가 평소의 사적인 대화에선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를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시’라고 하는 공적인 고급의 문장에서 ①처럼 쓰는 건 삼가야 할 것이다. 문어에서 ‘-에게’란 조사는 분명 ‘to’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비悲’라는 표기는 비와 슬픔을 한꺼번에 표현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한자를 이용한 말장난이 요즘 광고에 하도 많이 나와서 식상하지 않던가. ③에선 중복 피동의 표현이 거슬린다. ‘생략되는’으로도 충분한 것을 어색한 번역문체로 쓰는 건 좋지 않다. ④를 쓴 시인에게 과감한 표현을 썼다고 하기엔 거부감이 심하다. 신화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긴 하다. 근친상간의 표현을 육두문자로 직핍하는 건 내 상식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한 문장 때문에 「비밀」이란 좋았던 시를 손에서 놓고 같은 시인의 다른 시를 택한 건 무척 안타까웠다.

기왕에 우리 시인들이 자칫 틀리기 쉬운 ‘갖는다’와 ‘딛으며’라는 표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준말은 음절수를 생략하는 언어의 경제에서 나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가지다의 준말은 ‘갖다’, 디디다의 준말은 ‘딛다’이다. ‘가진다, 디딘다’로 충분한데 ‘갖는다, 딛는다’로 쓰는 건 음절이 줄어든 게 아니기에 ‘가진다’로, 디디며‘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현대시 백 년. 특히 최근의 우리 시는 놀랄 만큼 다양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바람직한 진화도 있지만 선두에 선 소수의 아방가르드 선수들이 범한 오류조차 후배 지망생들이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경우가 요즘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다.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가 위장병이 있어서 이따금 미간을 찡그리고 다닐 때, 궁녀들은 ‘아 저렇게 미간을 찡그려야 미인의 아름다운 표정이 되는구나’ 생각하고 너도나도 궁 안에서 찡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효빈(效顰)의 고사다. 선배 시인이 저지른 실험의 실패, 혹은 실수마저 따르고자 하는 효빈의 행위는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해하기 쉬운 시를 회피하여 굳이 난해한 시를 쓰기 위한 요령부득 혹은 언어도단의 수사를 구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최근 내 보기에는 송찬호의 「울부짖는 서정」, 신용목의 「호수 공원」, 안희연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조인호의 「철가면」같은 시들이 신인 지망생들의 본보기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 시의 내일을 지향하는 지표가 되리라 생각한다.

올해 삼사십대 세 명의 심사위원이 〈창비신인시인상〉 심사를 마치고 쓴 심사평 저 한 마디에 나도 뜨거운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독자가 없으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2015.9. 10. 원고 50 매)

 

—《시인수첩》 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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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補遺_ 4. 지향해야 할 시, 내일의 시와 관련, 제목만 언급한 중요한 시들>

 

겨울의 할례 / 김산

 

죽어가는 사람은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죽음을 각오했기에 죽음 따위는 애써 두렵지 않다는 듯. 산다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무용한 임계점이라는 듯. 죽음 너머와 죽음 넘어 사이에서 아직도 구원을 찾지 못하는 듯. 죽음이라는 관념과 주검이라는 구체 사이에서 이 한여름의 겨울은 도무지 덥고 습하다는 듯. 매실 밭에서 우리의 교주가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고 죽었습니다. 저의 하찮은 몸을 마지막까지 구더기에게 긍휼하게 나눠주신 그는 구도자셨지요. 귀갑테 안경도 없이 두꺼운 바이블도 없이 적막하게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죽음을 저녁 풀숲에 던져두자 주검이 새벽 풀숲을 방언으로 간증하셨다지요. 개미와 날파리 떼가 몰려들어 고개를 숙였고 산짐승 몇이 죽음의 내장을 육개장처럼 씹으며 그의 발인을 묵묵히 지켰습니다. 매실들이 밤별처럼 무럭무럭 자라 반딧불이와 함께 도란도란 합창을 했답니다. 성나게 발기했던 말씀들을 추운 바람이 건드렸지만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벌떡 일어나 주검을 재빠르게 수습하고 푸하하하 웃으며 전속력으로 달릴 것 같았지만. 죽음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죽음 앞에서 그의 뼈는 털썩 주저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죽음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울상을 짓고 죽은 척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매실주를 마시면 달달한 죽음의 향이 온몸에 사르르르 퍼집니다. 밤별과 반딧불이와 추운 바람이 이 한여름을 겨울로 내몰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래 전에 죽은 귀신입니다. 몹시 춥고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웹진『시인광장』 2014년 8월호

 


울부짖는 서정 / 송찬호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22세기시인》2015년 여름호

 


호수공원 / 신용목

 

네 머리를 떠난 네 생각이 여기 호수에 잠겨 있다 부러진 칼처럼, 헤엄치고 있다

꼭 누군가의 몸을 지나온 칼처럼,

 

빨갛다

헤엄쳐도 씻기지 않는다

 

물 밖에는 사람들이, 손잡이만 남은 칼을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 하고 있다 손잡이만 남은 칼 앞에서

웃고 있다,

찍어대도 피가 나지 않는다

 

너는 잉어의 눈알을 파먹고 온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인생은 가끔 그런 순간을 과거에 갖다 놓는다

살아 있는 느낌

 

살아 있는 느낌,

그것이 너무 싫다고 말했다

 

지느러미를 연기처럼 풀어 놓고 석양은, 알 수 없는 깊이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밤이라는 국경을 거슬러 헤엄치면 꿈나라에 닿겠지 그래서 묻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잠이 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꿈을 꾸면

그 나라는 도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모든 칼들이 손잡이만 남아 있는 나라,

 

돌아오는 집 앞 정육점에도 칼은 있다

 

거기 돼지를 지나간 생각이 걸려 있다 아직도 타고 있는 석양처럼 환해서, 한 덩어리 베어와 물에 담가 두었다

 

—《문장웹진》2015년 9월호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 안희연

 


염색공은 골몰한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우리는 태어났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

당신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툭하면 허물어지는 성벽을 가진 것은

그 때문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

플라스틱 병정들처럼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풀리지 않는 숙제

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먼 훗날 염색공은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켜낼 것이다

스스로 번져가는 무늬들

빛을 머금은 노래를



* 빅토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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